▲ 일러스트=이상진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0]
즐거운 편지 / 황 동 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시평]
처음에 사랑이 있었다, 마지막에도 사랑이 있을 것이다.
숱한 청춘의 연애편지에 등장했을 이 시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58년. 올해로 등단 50년이 되는 황동규(70) 시인이 《현대문학》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50살을 먹었다. 그런데 여전히 젊다. 시에도 역사가 생기고 생로병사가 있다. 50살 먹은 이 시가 교과서에 파묻히지 않고 여전히 생생한 현장의 사랑시인 것은 서정시의 뿌리와 통하기 때문이리라. 서정시란 삼라만상과 주고받는 연애에 가까운 것이니!
이 시는 시인이 까까머리 고3학생일 때 짝사랑하던 연상의 여대생에게 바친 시라 한다. 뜨겁고 아찔한 청춘의 섬광. 1950년대 폐허의 서울에 이런 시가 있어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어떤 각박한 시대에도 연애는 끊이지 않았으니 잔인하고 난폭한 세상을 함께 뒹굴면서 우리의 삶을 어루만져 준 것에 아무래도 우리의 사랑과 연애가 한몫을 하였으리.
초등학교 6학년 때 언니의 책장에 꽂혀있던 한 시집에서 보고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또박 또박 베껴 써 보낸 〈즐거운 편지〉, 그 위문편지를 어느 국군장병 아저씨가 마음에 받았을까. 훗날 다시 읽게 된 그 시집은 《삼남에 내리는 눈》이었다.
이 시의 '내 그대를 생각함은' 이후로 오는 것은 실은 다 여백이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편지를 쓰게(시를 짓게!) 하는 능동적인 여백이다. 나의 짝사랑이 그대 입장에선 사소한 것일 수도 있음까지 헤아린다. 그러나 그대가 '괴로움 속을 헤매 일 때'가 온다면 내가 그대를 지킬 거라고 다짐하는 결연한 열정! 자신의 사랑을 '사소함'이라 말하는 조숙함은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서도 얻지 못할 자세일 것이다.
그리하여 2연에서 나의 사랑은 한없는 기다림이 된다. 나는 이 사랑이 어디쯤에서 그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어쩌면 사랑이 그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 그칠 때의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이에게 사랑은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랑의 영원을 믿는 자. 사랑은 노년을 소년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소년을 원숙한 어른으로 만들기도 한다. 사랑은 대상을 향하지만 궁극적으로 인생에 대한 '나의 자세'를 가르치고 견인하는 스승이거니. 처음에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사랑이 있을 것이다.
시인 황동규는 50년 동안 13권의 시집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쟁쟁한 현역이다. 요즘 그가 내놓는 시들은 젊은 시인을 긴장시킨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도 기억력도 떨어지는데 상상력은 줄지 않는다"는 시인의 말이 눈송이처럼 서늘하고 뜨겁게 내려앉는다. 사랑을 아는 심장의 가장 중심으로.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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