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이상진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8]
찔레꽃 / 송 찬 호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어라 벙어리처럼 하�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2006년>
[시평]
'타임캡슐'에 묻힌 옛사랑의 흔적
한때 타임캡슐이 유행했다. 그것에 역사적 자료를 담아 보관하는 공적인 행사도 많았지만, 모름지기 타임캡슐이란 개인의 추억 속에서 빛을 발하는 법. 저마다의 인생에서 타임캡슐을 묻는 시점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송찬호(49) 시인이 불러낸 타임캡슐은 머언 먼 찔레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 아릿해라. 여자애가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가며 남자애에게 하얀 사기 사발 타임캡슐을 남긴다.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지만 훗날 가보라는 것인지 당장 가보라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아득한 마음이 불을 지펴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지 못할 무엇인가 사기 사발 속으로 흘러 들어갔으니, 그것은 먼 후일 시인이 된 남자애가 기어코 시로 다시 불러내게 될 타임캡슐 속의 편지.
하필이면 하얀 찔레꽃 덤불 아래라니! 찔레꽃의 숨소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달밤의 곡절은 아릿하게 가슴을 찌른다. 누군들 한번은 저런 순간을 가진 적 없겠는가. 엎어놓은 흰 사발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전하곤 했던가. 잊히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는 찔레나무가 한 그루씩은 가슴 한가운데 있었기에.
하지만 조심할 것. 이 시를 읽는 이들은 시인의 실제 경험을 상상하기 쉬울 테지만, 비밀은 아무도 모른다. 송찬호 시인은 소걸음처럼 느리고 정밀하게 시를 세공하는 시의 장인. 봄이면 흔히 만나는 찔레꽃을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다가 이런 청춘남녀를 그의 시에 불러와 세공하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그늘이 나의 그늘이 되고, 나의 그늘이 시의 앞면이 되는 생생함에서 그의 연금술은 절정을 이룬다.
송찬호 시인은 고향 충북 보은에서 평생을 사는 농부 시인이다. 농사일이 바빠서인지 도시의 속도에 익숙한 이들이 상대적으로 빠른 것인지, 아무튼 심한 과작이다. 과작인 만큼 그가 세상에 내보내는 시들은 태작이 거의 없다. 송찬호 '쩨(製)'는 거개가 명품들이다. 1989년 나온 첫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를 읽던 그때 나는 대학 2학년이었고, 세상은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히 아팠다. 아픈 세상에 위로가 되는 단단한 비극을 그의 시편에서 읽던 기억이 새롭다.
거의 20년이 흐르는 동안 그가 세상에 내놓은 시집은 통틀어 세 권. 농부와 시인을 잘 일치시키지 못 하거나 소박한 농촌일기를 쓸 거라고 생각하는 우리네 감각에 죽비를 치며 그는 이 시대 가장 세련된 미학주의자의 길을 걷고 있다. 속리산과 구병산 줄기가 만나는 보은군 마로면, 자연이 주는 온갖 것들에서 고품격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며 사는 그가 부럽다.
'현대시100년-애송시10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0] 즐거운 편지 - 황 동 규 (0) | 2008.11.04 |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9] 그대 있음에 - 김 남 조 (0) | 2008.11.04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7]연(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서정주 (0) | 2008.11.04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6] 사랑은 야채 같은 것 / 성 미 정 (0) | 2008.11.04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5]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0) | 2008.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