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金洙暎,1921.11.27-1968.6.16) 한국의 시인 1. 생 애 김수영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할아버지 김희종은 경기도 파주 문산,김포, 강원도 철원 홍천 등지 땅에서 500여석을 거두는 지주로서 정3품 통정대부중추의관을 지냈다. 김수영의 집안이 어떻게 해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가을이면 500석 넘게 소출을 싣고 오는 우마차들이 대문 앞에 줄을 섰을 정도로 상당히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 김태욱은 할아버지와는 달리 이제에 밝지 못하였고 재산관리에도 능력이 없었다. 1930년 김희종이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후 가세가 기울어 집안을 일으켜 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심화 끝에 병을 얻었다. 모친 안형순은 생활력이 매우 강했던 사람으로 부친이 자리에 누운 후로는 거의 혼자의 힘으로 집안을 이끌어 나갔다. 김수영이 태어날 무렵 집안이 기울기는 했지만 유년을 비교적 유복하게 보냈다. 백부 김태홍에게 아들이 없어 집안의 장손이나 다름없었던 김수영은 온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랐다. 14세가 되던 1934년 9월경 추계운동회을 마치고 장질부사에 걸려 폐렴과 뇌막염이 발병하여 1년동안 요양한 사실 이외에 김수영의 성장기에 특별히 주목할 점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1941년 12월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행의 동기가 유학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김수영이 사랑했던 고인숙이라는 여인 때문일 거라는 가족의 증언도 있다. 정확한 사정은 알수 없으나 김수영은 일본에서 고인숙을 만나지 못하였고, 동경성북예비학교에 들어가 대학 입학 준비를 하다가 그만두고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연극연구소를 찾아갔다. 김수영이 대학 입학 준비를 그만 두었으며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미즈시나 연극연구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이라는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시작(詩作)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이전에 연극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선린상업학교 2년 선배로서 김수영과 일본에서 기거를 같이한 이종구의 단편적인 증언이 있긴 하지만 구체적인 정황이 파악되지 않는 유학 시절을 청산하고 김수영이 귀국한 것은 1943년이었다. 만주 길림으로 떠난 가족들에게 간 것이 1944년이고, 1945년 광복을 맞아 그해 9월에 가족들과 서울로 돌아왔다. 1945년 이후 김수영의 생애 이력은 그가 쓴 여러 산문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한데, 1946년 무렵부터 김기림.김광균.김병욱.임호권.박인환.양병식 등의 문인들과 교우를 맺으면서『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게재하는 등 스스로도 밝힌 것처럼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하게 된다. 광복 이후부터 6.25가 발발하기 이전까지 김수영은 그가 교우를 맺었던 문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학의 길로 접어든 것이 늦었다는 자의식 때문에 불안감과 강박증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습작한 시에 대한 김병욱의 칭찬에 감격하기도 하고, 낡았다는 박인환의 지적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 그 나름의 습작과 시론 공부에 몰두하였다. 1950년 8월에 박계주.박영준.김용호 등과 의용군에 강제로 입대 북행하여 훈련을 받고 순천군 중서면 부근에 배치되었다가 탈출하였다.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남하하여 집부근인 충무로 입구까지 왔으나 경찰에 체포되어 포로 신분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52년 12월경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그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55년 6월 서울 마포에 정착하면서 이후로는 직장을 갖지 않고 양계를 하며 시와 번역에 전념하였다.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사령(死靈)」을 비롯한 몇편의 시를 통해 1950년대의 시대 상황과 관련한 시인의 고뇌를 읽을 수 있긴 하지만, 김수영이 시대와 예술가의 참여라는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나름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은 4.19 이후의 일이다. 1960년대에도 김수영은 양계와 번역료로 생활하면서 직장을 갖지않고 시,시론,시평 등의 왕성한 발표를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 의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폭로하였다.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귀갓길에 버스에 치여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6월 16일 운명을 달리하였다. 신동엽이「지맥 속의 분수」라는 조사(弔辭)에서 언급했다시피 우리는 그렇게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는 말로 대변하고 있다. 2. 김수영 신화 라는 현상 김수영 문학은 시인의 생전에는 비평적 조명을 그다지 받지 못하다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김수영 문학을 텍스트로 한 2차 문서들의 집합에는 시인에 대한 회상이나 시와 산문에 대한 단상을 비롯하여 본격적인 평론에 이르기 까지 약 120편의 길고 짧은 글들과 100여 편의 석사논문 그리고 10여편의 박사논문이 들어있다.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특히 활발한 조명 작업의 대상이 되어 온 김소월.한용운.서정주 등과 관련한 2차 문서들의 경우와 비교해 볼때 김수영 문학과 관련한 2차 문섣르의 수치가 특별히 많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김수영 신화'라는 문화적 현상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시대의 특수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흔히 김수영의 시적 주제로 거론되는 '자유', '정직', '양심', '사랑' 등은 바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시대적 화두였다. 정치적 억압,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문화적 혼란 상황 속에서 능동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훼절과 침묵으로 일관한 대다수 지식인들의 부정적인 행태 등으로 기억되는 시대였다. 그처럼 어둡고 어려운 시대일수록 가장 평범한 일반적인 덕목이 소중해지고 또 지켜지기 쉽지 않다. 초기에는 시와 산문을 통해 주장한 김수영의 전언들이 자주 인용되고 중요한 의미로 평가되었지만 차츰 한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조명하는 문학적 실체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모더니스트.참여론자.난해 시인 등의 비평적 수사에서 벗어나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시적 주제는 무엇이고 그것은 그의 시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그 시적 방법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과 관련한 논의로 접근 태도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김수영 문학을 텍스트로 한 논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네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 첫째 시와 산문에서 주도적으로 드러나는 주제어 분석을 통해 그의 시 세계와 시 의식을 이해하려는 논의, 둘째 시의 형식과 구조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그이 시를 체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김수영 시의 특질을 밝히려고 시도한 것, 세째 시와 산문 전체를 포괄하여 조명하면서 김수영 시의 문학사적 의의와 시사적 위치, 그리고 영향관계를 고찰한 논의, 네째 김수영의 산문에 산재해 있는 시에 대한 그이 사유의 흔적들을 포착하여 김수영의 시론을 재구성해 보고자 한 논의이다. 그의 시와 산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강렬한 현실 감각과 사회 의식'에서 비롯하는 것인데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시와 관련한 그의 사유 구조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시와 사회에 대하여 자신을 생각을 개진할 때 언제나 일단의 대립항들을 설정해 놓고 그것들이 맺는 부단한 긴장관계를 강조한다. 사상과 형태, 침묵과 요설,언어의 서술과 언어의 작용, 기술가적 발언과 지사적 발언,검증과 생성,시를 쓰는 것과 시를 논하는 것, 예술성과 현실성, 내용과 형식 등이 그가 설정한 주요 대립항들이다. 김수영은 이러한 대립항들의 긴장 관계에서 빚어지는 역동성을 자신의 사유와 시쓰기를 위한 에너지의 원천으로 삼았다. 3. 양심의 살아 있는 시화와 시의 완성 김수영 시의 가장 흔한 모티프의 하나는 폭로적인 자기 분석이다. 죄와벌(1963), 강가에서(1964),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식모(1966), 엔카운터지(1966), 전화이야기(1966), 도적(1966), 美濃印札紙(1967), 성(1968),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1968)등 1960년대에 그가 쓴 시들은 대체로 폭로적인 자기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김수영의 그런 자기 해부와 노출은 늘 꾸임없는 직선적인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자기 분석은 김수영의 시의 구심적 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시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1960년대 발표 작품뿐만 아니라 1950년대 발표한 작품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그러한 자기 분석을 발견할 수 있다. 1950년대의 작품들에서도 언제나 분석 주체로서의 '나'가 등장하여 자신의 생활과 정신과 예술에 대해 반성한다.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億萬無慮의 悔辱인 까닭에"(<너를 잃고>,1953), "나는 구태여 생각하여본다/그리고 비교하여본다"(시골선물,1954), "사람이야 말할수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저 날짐승이라할까"(도취의 피안,1954), "나의 천성은 깨어졌다/ 더러운 붓끝에서 흔들리는 汚辱(PLASTER,1954), "고통의 영사판 뒤에 서서/ 어루대며 변하여가는 찬란한 현실을 잡으려고/ 나는 어떠한 몸짓을 하여야 되는가"(영사판,1955), "먼 산정에 서있는 마음으로/나와 자식과 나의 아내와/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구름의 파수병,1956),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서시,1957),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아래에서/간간이/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사령, 1959). 이러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작품들의 특징은 시인 자신의 구체적 일상을 분석 대상으로 삼으면서 거기에다 희화적인 극적 정황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하는「도적」을 보자. 돈에 치를 떠는 여편네도 도적이 들어왔다는 말에는 놀라지 않는다 그놈은 우리집 광에 있는 철사를 노리고 있다 시가 칠백원가량의 새 철사뭉치는 우리집의 양심의 가책이다 우리가 도적질을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훔친거나 다름없다 아니 그보다도 더 나쁘다 앞에2층집이 신축을 하고 담을 두르고 가시철망을 칠때 우리도 그 철망을 치던 일꾼을 본 일이 있다 그 일꾼이 우리집 마당에다 그놈을 팽개 쳤다 그것을 그놈이 일이 끝나고나서 가져갈 작정이었다 막걸리값으로 하려고 했는지 아침쌀을 팔려고 했는지 아마 그 정도일 거라 그것을 그놈이 가져 가기 전에 우리가 발견했다 이 횡재물이 지금 우리집 뜰아래 광에 들어있다. 나는 도적이 이 철사의 반환을 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집 건넌방의 캐비네트를 노리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광문에 못을 쳐놓았다 그 이튼날 여편네와 식모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철사뭉치는 벌써 지하실에 도피시켜 놓은 모양이었다 도적은 간밤에는 사그러진 담장쪽이 아닌 우리집의 의젓한 돌기둥의 정문 앞을 새벽녘에 거닐었다고 한다 시험공부를 하느라고 밤을 새는 큰아이놈의 말이다 필시 그럴거라 -「도적」중에서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제목 그대로 모두 도적이다. 시인의 집 마당에 슬쩍 철사를 던져 놓은 인부도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지키려고 광 문에 못을 치는 시인도 더욱 잽싸게 지하실에 도피시켜 놓은 시인의 아내도 식모도 도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부모의 말만 듣고 도적이라고 생각한 시인의 큰 아들도 담장에 철조망을 두르는 이층집 주인도 모두다 도적이다. 특히 시인은 의젓한 돌기둥으로 된 자신의 집 정문을 묘사함으로서 담장에 철조망을 두르는 이층집 주인과 자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넌지시 보여준다. 김수영이 가장 증오한 것은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 의식이었지만 그런한 것을 증오하고 비판하는 자기 자신조차도 거기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냉철하게 인식했다. 김수영에게 폭로적인 자기분석은 타자와 세상의 허위를 비판할 수 있는 지점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타자와 세상의 허위를 비판하는 방법이었다. 김수영의 시를 정직 이나 양심, 나아가 자유와 같은 개념들을 통하여 평가하는 근거도 그러한 사정에 있는데 그러한 평가들은 이른바 김수영 신화의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폭로적인 자기분석과 꾸임없는 직선적인 언어가 신화라는 후광과 함께 그이 시와 산문에 대한 열렬하고 폭넓은 독서 반응 지평을 형성해 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평가받을 만한 문학사의 사실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폭로적 자기분석의 방법론과 관련한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것과는 계열의 작품들에 대한 참조가 필요하다 그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거위소리와 눈>이다. 거위의 울음소리는 밤에도 여자의 고마색 원피스를 바람에 나부끼게 하고 강물이 흐르게 하고 꽃이 피게하고 웃는 얼굴을 더 웃게 하고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한다 - 「거위 소리」전문 1964년 3월에 발표한 이 작품은 우연히 듣게 된 거위의 울음소리와 또한 우연히 보게 된 몇가지 풍경을 동시성과 필연성의 맥락에서 연결한 것이다. 여자의 호마색 원피스와 강물과 꽃을 얼굴은 원래 거위의 울음소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들이다. 사건으로서의 시와 구조로서의 시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이 작품의 결구인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한다 는 선언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66년 1월에 발표된 「눈」은, 「거위소리」와 비교할 때 사건으로서의 시와 구조로서의 시가 훨씬 더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작품이다.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린다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줄 건너 두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눈」전문 「거위 소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도 화자는 어떤 사건에 대하여 보고하고 있다. 아니 그 어떤 사건을 선언하고 있다. 그 사건은 폐허에 눈이 내린다 는 것이다. 첫 행에서도 알수 있듯이 이 시는 현실의 경험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 지속해서 눈이 내리는 모습이 작품에 수용되면서 하나의 사건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는데 그런 사건화에 기여하는 것은 바로 작품의 구조이다. 시에서 성취된 사건은 현실의 경험 세계에서도 성취될 어떤 것을 환기시킨다. 시가 나아가 예술이 양탄자와 같은 단순한 장식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그 어떤 진리 내용에 도달할 수 있는 근거도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어떤 것의 존재 가능성을 그와같이 작품 자체를 초월함으로써 환기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눈과 거위소리는 여런 측면에서 폭로적인 자기분석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67년에 발표한 꽃잎(1)과 꽃잎(2) 그리고 미인도 같은 계열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경험세계에서 이끌어 온 요소들을 언어의 의미론적 자질과 비의미론적 자질의 충돌과 긴장을 통해 새로운 짜임 관계 속에 놓이게 함으로써 작품 그 자체의 완성으로 나아가려는 방향성을 지닌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단시적 완성의 의도적 훼손과 개칠이 없는 일회적 정직의 순간에 대한 지향이 상처 낸 선혈로 흥건하다"는 견해는 김수영 문학에 대한 적실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김수영이 작품의 미학적 완성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그 이유는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시의 완성이 아니라 양심의 살아있는 詩化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는 분명히 수정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양심의 살아있는 시화"를 통하여 김수영이 긍극적으로 지향했던 것이 바로 "시의 완성"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우리는 김수영 자신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제시할 수 있다. "언어의 윤리라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대시에 있어서 언어의 순수성이 현대사회에 있어서 시인의 순수고독과 동의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현대의 시인이 이행하고 있는 언어의 순수성이 사회적 윤리와 인간의 윤리를 포함할 수 있을 만한 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 근대 문학사의 맥락에서 참여시와 순수시의 변별 기준이 되는 언어의 순수성은 정치성의 유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김수영이 말하고 있는 언어의 순수성은 그것이 사회적 윤리와 인간의 윤리에 연결된다는 사실에 근거할때 세계나 현실의 타락과 불의에 대한 보편적 부정과 절대적 비순응주의의 표현 매체로서 언어가 갖는 순수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김수영에게 양심의 살아 있는 시화와 시의 완성은 두 가지 가능한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연적 과정의 절차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양심의 살아있는 시화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결코 '시의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낱 고급 수사학 연습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4. 이후의 과제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김수영은 시와 관련한 자신의 사유의 과정에서 여러 유형의 대립항들을 이끌어 들인다. 그들 대립항들의 핵심은 예술의 자율적 본질과 사회적 본질의 첨예한 대립의 문제이다.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김수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촉발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서구 근대 예술의 성립과 전개 과정에서 부단히 제기된 문제이며, 그러한 사정은 우리 근대 시문학사의 성립과 전개과정에서도 결코 예외적이지 않았다. 김수영에게서 특별한 점은 그가 서로 긴장관계에 놓여있는 그 두 가지 요인들을 추상적 이분법의 구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그것들이 통일될 수 있는 어떤 지점에 대해 고민하였다는 것이다. 김수영의 대표적 시론인 <시여,침을 뱉어라>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예술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현실성과 예술성의 문제와 함께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김수영이 예술의 사회적 본질과 자율적 본질에 대한 해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게해준다. 그가 내용과 형식이라는 범주만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했다면 그 시도는 그 자체로서 형식적인 범주의 논의 속에 한정되고 말았을 것이다. 김수영에 따르면 시에서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그와같이 추상적으로 도식화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술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형식은 작품의 기법이나 기교 혹은 단순히 감각적 요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형식은 작품에 수용된 모든 개별적 요인들의 미학적 연관 관계에 대한 총괄 개념이다. 현대의 문제적 상황에 대한 의식 없이는 현대시를 쓸 수 없으므로 시인은 현실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지성을 갖추어야 하지만 동시에 시인은 씨를 쓰는 사람이므로 '언어의 작용'에 투신할 수 있는 기술자로서의 고민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시에 대한 김수영의 사유의 핵심이었다. 예술성과 현실성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통일될 수 있는 어떤 지점이나 순간에 대한 김수영의 사유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1920년대의 "내용과 형식 논쟁'이나 1930년대의 '기교주의 논쟁', 그리고 1960년대의 '순수와 참여 논쟁'의 자장권 안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영은 부단히 '제 정신'혹은 '양심'을 지키는 것을 시의 창조 행위와 동일시하였으며, 이러한 동일시가 김수영 문학에 윤리적 밀도를 부여하였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듯하다. 사회와 삶에 대한 지식인의 윤리적인 태도를 시인의 예술적 창조 행위 쪽으로 부단히 근접시키려 했던 김수영의 노력이 그를 4.19 이래 보기 드문 '깨어있는 정신의 소유자'로 평가받게 하는 근거가 되지만 그로 인해 정작 그의 문학은 생성으로 절적 비약을 하는 초월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였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듯하다. 필자가 보기에 '예술성'과 '현실성'의 문제는 하나의 작품 안에서 저마다 가진 나름의 스타일에 의해 통합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김수영의 신념에 근거할 때 그이 전체 작품세계에 대한 보다 철저한 분석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폭로적인 자기분석의 계열에 속하지 않는 계열의 작품들과 관련하여 좀더 깊은 이해가 뒤따라야만 비로소 김수영 문학과 그의 시 의식의 전모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내용출처 : [기타] 도서:한국시인론(백년글사랑,2003) |
출처 : 무소뿔
글쓴이 : 무소의 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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