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꿈꾸다 포기해서 단편 소설을 쓰고, 단편 소설을 쓰다 절망해서 장편 소설을 쓰고, 장편 소설을 쓰다 (또) 절망해 '평론'을 쓴다는 말이 있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비평이나 평론이 문학에 있어 가장 '열등한' 영역으로 치부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먼저 시인이나 소설가는 창작자임에 반해 평론가는 그 창작물에 기대어 - 심하게 말하면 기생하여 - 활동하는 것을 빗댄 말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난 이런 열등함이니 기생이니 하는 말과 상관없이, 평론을 잘 읽지 않았다. 왜냐면, 논란이 되고 비평의 소재가 되는 소설들을 읽기 전에는 비평에서 행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문단의 경향이나 주제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평론들을 읽으면 따분하고 어렵고 재미없고 그랬다. 그게 불과 일년 전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부지런히 한국문학을 읽고 억지로라도 평론집을 몇권 읽었더니 조금씩 조금씩 감이 잡힌다. 사실 문학 평론을 먼저 읽고 그 평론에 나온 문학작품을 나중에 읽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독서태도는 아니겠으나 반드시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먼저 그냥 작품을 접할 때에 비해 작품의 창작 배경이라던가 작가의 성향이라던가 다른 작품을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바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냥 읽는다면 놓쳐버릴 수도 있는 부분들을 캐치하게 해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이러한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물론 평론가의 시각을 먼저 접합으로써 그 평론가의 시점에 동화되어 책을 읽는 위험도 크니 이건 경계해야 할 듯 싶다.
지금 나는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과 '카이로스의 문학'이라는 두 권의 문학평론집을 읽고 있다. 두 권 다 무척 흥미로운 책인데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연옥'에서 이명원이 행한 김수영의 '풀'에 대한 해석이다. 김수영의 풀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무척 유명한 시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풀이 '저항하는 민중'을 바람이 '외세의 억압이나 정치적 억압'을 상징한다고 가르친다. 나는 몰랐는데 여기에 대한 반론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황동규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비를 몰아오는 바람을 풀이 싫어할리 없다는 '생태생물학적'인 반론을 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원은 무척 색다른, 정말이지 색다르게 이 시를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김수영의 풀은 "여성의 자위행위의 와중에 생성되는 희열의 국면을 형상화한"시이다. 풀은 "여성의 성욕을 표상하는 상징"이며 이 시는 "여성의 성욕이 리드미컬하게 확산되면서 동시에 절정에 이르는 희열의 상징적 표현에 바쳐지고"있다는 말이다. 글쎄, 시의 해석은 분분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렇게까지 해석해도 되는 걸까? 이명원의 이러한 해석은 테트리스를 보고 삽입성교를 떠올리고 아이스크림 거북알을 보며 콘돔을 연상하는 일군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평의 내적논리가 조금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요즘 몇권의 평론집을 읽으면서 평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평론은 자칫하다 나무만을 볼 수 있는 위험을 줄여주는 동시에 전체적인 숲을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마련해준다. 처음엔 어렵고 딱딱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책을 읽으려는 친구들에게 평론을 권하고 싶다. 평론과 텍스트는 선순환이다. 평론이 무척 흥미있었다면, 그 텍스트를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텍스트를 쓴 작가의 다른 텍스트에까지 관심이 미치게 되니 정말로 문학평론은 도랑치고 가재잡고, 꿩먹고 알먹고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평론들을 읽으면 따분하고 어렵고 재미없고 그랬다. 그게 불과 일년 전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부지런히 한국문학을 읽고 억지로라도 평론집을 몇권 읽었더니 조금씩 조금씩 감이 잡힌다. 사실 문학 평론을 먼저 읽고 그 평론에 나온 문학작품을 나중에 읽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독서태도는 아니겠으나 반드시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먼저 그냥 작품을 접할 때에 비해 작품의 창작 배경이라던가 작가의 성향이라던가 다른 작품을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바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냥 읽는다면 놓쳐버릴 수도 있는 부분들을 캐치하게 해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이러한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물론 평론가의 시각을 먼저 접합으로써 그 평론가의 시점에 동화되어 책을 읽는 위험도 크니 이건 경계해야 할 듯 싶다.
지금 나는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과 '카이로스의 문학'이라는 두 권의 문학평론집을 읽고 있다. 두 권 다 무척 흥미로운 책인데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연옥'에서 이명원이 행한 김수영의 '풀'에 대한 해석이다. 김수영의 풀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무척 유명한 시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풀이 '저항하는 민중'을 바람이 '외세의 억압이나 정치적 억압'을 상징한다고 가르친다. 나는 몰랐는데 여기에 대한 반론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황동규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비를 몰아오는 바람을 풀이 싫어할리 없다는 '생태생물학적'인 반론을 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원은 무척 색다른, 정말이지 색다르게 이 시를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김수영의 풀은 "여성의 자위행위의 와중에 생성되는 희열의 국면을 형상화한"시이다. 풀은 "여성의 성욕을 표상하는 상징"이며 이 시는 "여성의 성욕이 리드미컬하게 확산되면서 동시에 절정에 이르는 희열의 상징적 표현에 바쳐지고"있다는 말이다. 글쎄, 시의 해석은 분분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렇게까지 해석해도 되는 걸까? 이명원의 이러한 해석은 테트리스를 보고 삽입성교를 떠올리고 아이스크림 거북알을 보며 콘돔을 연상하는 일군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평의 내적논리가 조금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요즘 몇권의 평론집을 읽으면서 평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평론은 자칫하다 나무만을 볼 수 있는 위험을 줄여주는 동시에 전체적인 숲을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마련해준다. 처음엔 어렵고 딱딱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책을 읽으려는 친구들에게 평론을 권하고 싶다. 평론과 텍스트는 선순환이다. 평론이 무척 흥미있었다면, 그 텍스트를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텍스트를 쓴 작가의 다른 텍스트에까지 관심이 미치게 되니 정말로 문학평론은 도랑치고 가재잡고, 꿩먹고 알먹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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