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도장골 시편-넝클의 힘 / 김신용

자크라캉 2007. 5. 5. 15:51

                    

                     사진<.......>님의 블로그에서

 

 

미당·황순원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날품·노숙 30여 년 `지게꾼 시인`

 

 

생명 있는 미물들의 자존심 노래 

 



여섯 달쯤 전, 시인은 도장골에서 나왔다. 충북 충주시 신리면, 개복숭아 숲에 둘러싸여 도장골이라 불리는 산골에서 시인은 한 해를 꼬박 살았다. 산골짜기의 헌 집을 빌려줬던 집주인이 외국에서 돌아오면서 환갑의 시인은 다시 짐을 쌌다. 마침 경기도 안산, 소래 포구가 지척인 곳에서 빈집을 찾아냈다. 갯벌 복판에 뎅그러니 놓인 집이라, 버스 정류장까지 20분을 걸어나와야 했다.


 "편안한 얼굴이십니다. 도장골이 좋았지요?"


"좋았지, 시가 쏟아져 나왔지, 마누라도 놀랄 만큼 써댔지."


산중(山中)의 시인은 부쩍 시에 매달렸다. 한 해 만에 38편을 발표했다. 올해 미당문학상 최종심 후보자 가운데 가장 많은 발표 편수다. 예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도장골 시편' 연작은 38편까지 마무리했다. 십여 편 더 쓰면 '도장골 시편'이란 이름으로 시집 한 권 묶을 생각이다.


"수의(壽衣)는 여전히 짜세요?"


"그럼, 그런데 일이 잘 안 들어와."


열네 살 되던 해 집을 나와 부랑아로 30여 년을 산 시인이다. 그 사이 안 해본 일 없는 시인이다. 지게 지고, 날품 팔고, 노숙하며 겨우겨우 버텨냈던 시인이다. 그 험한 세월 속에서도 남산도서관에 올라 책을 읽고, 홀로 시를 공부했던 시인이다. 나이가 들어선 내외가 함께 수의를 짜며 쌀을 벌었고, 그렇게 번 쌀로 시를 썼다. 지금도 부부는 20여만 원으로 한 달을 산다.


"난 원래 노동시인이 아니었어. 그래서 80년대엔 계급의식이 없다는 소리도 들었어. 그런데 말이야. 배 곯아본 적 있어? 가난은 사람을 망가뜨려. 인간성 같은 건 짓밟아 버려. 난 그 피폐한 인간성을 시로 썼을 뿐이야. 리얼리즘? 다 배부른 얘기야. 도장골이 고마운 건, 내 시가 온전한 인간성을 갖춘 시가 됐기 때문이야."


산 속 살림이라고 해서 형편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시인은 예전처럼 가난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연에 감사하거나 전원생활을 예찬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시인은 자연에서 삶의 존엄 같은 걸 발견한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청개구리,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두꺼비, 늦가을 땅바닥의 밤 한 톨에서 생명 있는 것들의 자존심을 발라낸다.


여기 실린 '민달팽이'편도 그러하다. 맨살 드러낸 달팽이를 지켜보자니 안쓰러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배춧잎 한 장 얹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민달팽이에겐 고작 그늘일 뿐이다. '치워라, 그늘!' 실존의 존엄을 지키려는 민달팽이의 호령이다.


그러고 보니 시인은 민달팽이를 닮았다. 시인은 가난이 부끄럽지 않고, 민달팽이는 껍질이 거추장스럽다.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 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가, 저렇게 허공 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가, 저 호박을 따리

사진<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창작과비평’ ‘도장골 시편-넝쿨의 힘’2006년 봄호 수록)


2006년 한 해 동안 문예지에 발표된 시 중 가장 좋은 작품으로 뽑힌 김신용(62) 시인의 연작시 ‘도장골 시편-넝쿨의 힘’ 전문이다.


도서출판 ‘작가’는 14일 시인 평론가 편집인 등 150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발표된 시편 가운데 가장 좋은 시를 설문 조사한 결과 김신용 시인의 ‘도장골 시편’이 20회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작가’는 김신용 시인의 이 작품은 “내면과 현실의 지극한 싸움의 기록이기도 한 이 시편은 소멸과 폐허를 뛰어넘어 새로운 정신적 지경을 열어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소년원, 갱생원 등을 내 집 드나들 듯하는 생활을 하다가 1988년 무크지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인이 됐다. 김 시인은 등단 첫 해 지게꾼 등 밑바닥 생활 체험을 녹인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을 발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준 바 있다.


김 시인은 또한 2005년 제7회 천상병 시상(詩賞)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