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레오나르도>님의 플래닛에서
싱겁고 싱거운 / 김 근
어느 날 집안에 물이 차올랐습니다 물은 모나거나 이 빠진 우리 집 세간을 적시고 부뚜막과 방구들을 적시고 이부자리를 적시었습니다 방바닥에 팔을 괴고 모로 누운 나는 몸 한쪽부터 젖었습니다 낡은 앉은뱅이책상이 젖고 한 귀퉁이가 녹아 눌은 흑백텔레비전이 젖었습니다 흑백텔레비전 안의 여자도 젖어 얇은 옷 속의 몸이 다 드러났습니다 물에 잠긴 나는 그만 헐렁한 바지가 부풀어 둥둥 방안을 떠다녔습니다 해도 나는 창호지 문밖으로는 나가보지 않았습니다 구멍 뚫린 문창호로 초록색 물뱀들이 술술 잘도 헤엄쳐 들어왔습니다 내가 차마 씻어내지 못한 말들은 뽀로록 뽀로록 거품이 되어 떠올랐구요 나중엔 지붕마저 둥둥 방안을 떠다녔습니다 나는 떠다니는 기왓장을 밟아 부엌으로 갔습니다 엄마 이제 그만 좀 하세요 가랑이 사이로 물을 쏟아내는 일일랑 그러자 거짓말처럼 물이 빠져나갔습니다 나는 다시 방바닥에 팔을 괴고 그제야 가라앉았습니다 머리카락에 비늘처럼 잔뜩 개구리밥을 묻히고 엄마는 곧 밥상을 들였습니다 싱겁고 싱거운 점심 한 끼였습니다
ㅡ시평 제25호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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