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스크랩] 鍾路五街 - 신동엽

자크라캉 2007. 1. 5. 10:48

鍾路五街 - 신동엽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群象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 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 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흽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1967년, 동서춘추>

 

출처 : 시평
글쓴이 : 이원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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